남자들이 재미있는 이야기 또는 우수운 이야기할때나 술취해서 이야기할때 보통 절개와 지조이야기를 하는데요,,,
그 속깊은 뜻과 과거 역사에 담긴 뜻을 찿아보았네요,,본인의 생각이오니 가볍게 읽어 보세요,,,
절개, 지조, 정조’는 모두 엇비슷한 내용이네요 굳이 나눈다면 절개가 지조와 정조를 모두 포함하는 포괄성이 있네요.
단지 정조’라는 표현이 이상하게 여성분들에게 집중이 되는데요 원래는 이 세가지 표현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살아가는
정신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후에 이상하게 변한 것 같고요 아마도 열녀문이 그 효시가 된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절개, 지조의 상징은 사군자, 소나무 등이 있는데요, 특히 매화는 어사화<<조선시대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종이꽃. 급제했음을 상징해주는 머리장식용 꽃>>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또한 드라마, 영화에서 수도 없이 나오는 것이 사군자네요.
절개와 지조를 지킨 인물은 많은데요 여기서는 청음 김상헌<<이분의 평가는 사람마다 틀립니다 여기서는 사회적/정치적 상황은 모두 배제하고 오로지 절개 부문만 이야기 합니다>>, 매죽헌 성삼문을 발췌하였습니다. 절개의 반대편은 당연히 변절자입니다. 조선시대 그 대표적 인물이 신숙주, 정인지 인데요 특히 신숙주 경우는 숙주나물로 희자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으나, 제사때 빠지지 않는 숙주나물이니 역사는 참으로 아이니컬하지요.
“””””지조와 정조는 다 같이 절개에 속하며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 생활의 이욕(利慾)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그럼 그 뜻들을 함 읽어보시죠,,,,,
절개(節槪/節介)
신념, 신의 따위를 굽히지 아니하고 굳게 지키는 꿋꿋한 태도.
지조(志操)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켜 나가는 꿋꿋한 의지. 또는 그런 기개
정조(情操)
진리, 아름다움, 선행, 신성한 것을 대하였을 때에 일어나는 고차원적인 복잡한 감정. 지적ㆍ 도덕적ㆍ 종교적ㆍ 미적 정조로 나눈다.
절개의 상징
사군자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한꺼번에 일컫는 사군자(四君子)는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고 싱싱함을 유지하는 이 식물 고유의 특별한 속성이 마치 인품과 학식을 겸비한 군자와 같다고 보고 네 명의 군자라 부른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흔히 ‘매란국죽’ 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의 장점을 잘 보여주는 계절을 춘하추동의 순서에 맞춰 배열한 것입니다.
매화
절개의 상징인 매화와 댓잎을 비녀에 새긴 것이 매화잠(梅花簪)이다.
머리에 꽂아 일부종사의 미덕을 언제나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축일에 부녀자가 머리에 매화를 장식(梅花粧)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松)와 대나무(竹) 그리고 매화(梅)를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시인묵객들의 작품 소재로 즐겨 다루어 졌다.
千 年 老 恒 藏曲 梅 生 寒 不 賣 香
오동나무는 천년의 세월을 늙어가며 항상 거문고의 소리를 간직하고
매화는 한평생을 춥게 살아가더라도 결코 그 향기를 팔아 안락함을 구하지 않는다.
청음 김상헌
김상헌(金尙憲, 1570년 ~ 1652년)은 조선 중·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병자, 정묘호란시 척화대신으로 이름이 높았다.[1] 본관은 (신)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 서간노인(西磵老人)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청나라에 압송되어 가면서 조국의 산천을 돌아보며 남긴 시조 ;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매죽헌 성삼문
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
생원으로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였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서 실패하고 만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니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하였으며, 그 이듬해 아버지 성승·박팽년 등과 같이 상왕(上王 :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에 착오가 생겨 세조의 직접 심문과 가혹한 고문 끝에 박팽년·이개·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와 함께 한강가(지금의 용산역 근처)에서 처형되었으니 이를 사육신이라 한다.
성삼문(成三問)의 절의가(絶義歌)
首陽山(수양산) 바라보며 夷齊(이제)를 恨(한)하노라
주려 주글진들 採薇(채미)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 거신들 긔 뉘 따헤 낫다니